목자들에게 닥친 상황 세 가지
- 예레미야25:35~36 -
 
서산뉴스

 

  오늘은 1년 52주 중에서 51번째 주일인데 현장예배는 오늘로 마무리합니다. 

 

  25일 성탄절은 가족과 함께 유쾌하게 보내시고 유튜브로 성탄절 큐티를 보내 드릴테니 그 말씀으로 대체하시구요. 

 

  다음 주일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데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예배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1월 첫 번째 주일이 5일인데 그때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은 대인관계를 할 때 상대성이 있어서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잘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 자식 간에도 부모에게 잘하는 자식에게 부모도 마음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친구 간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한테 잘 하는 사람에게 나도 잘 하게 되지 나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며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절대 잘해주지 않고 근처에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도 보면 친구라도 예의없이 함부로 말하고 무대뽀인 사람은 상대하기가 불편해서 거리를 두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예의를 지키고 공손하며 말을 할 때도 듣기 좋은 말을해서 깍듯하게 하면 그게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반대로 앞과 뒤가 다르고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며 이랬다 저랬다 하면 헥갈리고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으며 경계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똑같이 약속한 것은 지키고 사정이 생겼으면 설명을 해서 이해와 도움을 구하려면 오해가 없지만 그 순간만 모면하려고 둘러댄다면 신용을 잃어버립니다. 

 

  시간약속도 잘 지키다가 어쩌다 늦으면 무슨 일이 있나? 아니면 차가 밀리나 하고 걱정하며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매번 늦고 시간약속을 안지키면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인식을 해버리고 개념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좋은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처럼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원수질 이유도 없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목자들이 만난 상황이 어땠는지 세 가지를 깨닫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 도망하거나 도피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어느 순간이 되면 도망해야 하고 이 말은 피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유대의 목자들에게 도망하거나 도피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결국 피난할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24장에서 마지막 때 대처방안에 대해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5절에서는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멸망의 가증한 것은 거짓선지자와 적그리스도이고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까지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16절에는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이 말은 영적으로 높은 곳에 다다를 수 있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7절-“자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지붕 위에 있다는 것은 영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말하고 그들을 향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나타난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영적인 생활을 하던 자리에서 세상으로 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18절-“밭에 있는 자는 겉 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밭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감당하던 종들이고 이들은 환난소식이 들릴 때 겉치레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속을 단장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지금까지 애써서 영적인 생활을 하다가 끝에 가서 주섬주섬 겉옷, 즉 학위, 무슨무슨 장을 맡는 것은 겉 옷이라는 것입니다. 

 

  *19절-‘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영적인 교회는 아들을 벌써 낳아서 이미 성장했어야 하는데 환난 소식이 들리니 그때 아이를 밴다던가 젖을 먹이고 있다는 것은 불법입니다. 

 

  아들은 영이고 영은 말씀이며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는 하나님입니다. 

 

  이미 영적인 교회로 성장했어야 하고 영적인 신앙으로 성숙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둥 가만히 있다가 환난소식이 들리니 그때서 영적인 신앙은 찾거나 벌써 단단한 식물을 먹고 있어야 하는데 젖이나 먹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20절이 절정인데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도망하는 일은? 피난하고 예비처로 가는 일을 말하고 겨울은? 환난 때이며 안식일은 천년왕국이고 거기에 들어갈 준비를 겨울이나 안식일이 오기 전에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을 함에 있어서 영적인 것을 외면하고 있다가 뒤늦게 때가 다 지났는데 그때서 우왕좌왕하는 것은 준비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그때 닥쳐서 환난에서 도망하려고 하지 말고 미리 준비하기 위해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21절에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예수님 재림 때가 가까워지면 큰 환난이 있는데 ‘창세 이래로 없었던 환난’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환난의 규모나 크기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창세 이래로 없었던 전혀 다른 종류의 환난을 강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환난은 세상에 기근, 전쟁, 질병, 지진으로 나타난 육적인 환난이었다면 마지막에 임하는 환난은 교회환난이고 영적인 환난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영적인 말씀이 사라지고 거짓선지자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환난이기에 창세 이래로 처음 있는 환난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한 것은 목자들이 도망하거나 도피할 수 없다고 못박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서 때를 따라 주시는 양식을 먹고 미리미리 준비해야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들을 보면 공통점은 등불을 켜고 있었고 10명 모두 졸면서 신랑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등불만 들고 있는 자들과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릇에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 로 신랑을 맞이하느냐? 맞이하지 못했느냐가 결정되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다린다고 다 신랑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자가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준비예요. 기다리는 것도 준비하고 기다려야 의미가 있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기다린다고 신랑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자들은 미리 준비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날아 되면 피난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부르짖는 소리가 있습니다. 

  부르짖는 것도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미리미리 부르짖어야 하나님이 들으시지 유예의 시간이 다 지나가고 환난이나 심판 앞에서 부르짖는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부르짖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소리쳐 기도하는 것인데 기도도 중언부언하며 내용도 없이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때에 맞아야 하고 기도에 담기는 내용도 있어야 합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맨날 달라고나 하는 내용으로 기도한다면 그는 어린아이라는 말입니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시대에 맞게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기도가 왜 중요하냐 하면 내 몸이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기 전에 먼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로 상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해야 나중에 우리의 몸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지 기도가 가지 않는데 몸이 갈 수 있겠어요?

 

  계시록5장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나오는데 그들이 어린 양 앞에서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성막에는 성소가 있어서 그 안에서 제사장들이 일곱 등불을 꺼지지 않게 돌보고 떡상과 분향단을 관리하는데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 향을 피워 향기를 올려드리는 향이 가득한 금대접이 있는데 이 향은 기도라고 했으니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가기 전에 먼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로 올라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면 나중에 우리 몸도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지 지금 기도가 상달되지 않으면 그날 가서 몸은 절대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도 때를 따라 주시는 양식을 먹어야 하듯이 기도도 시대적으로 주신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의 약속을 구할 때 향이 되어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기도의 모범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먼저 기도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이 알려 주셨으니 이렇게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다의 목자들은 평소 울어야 할 때는 울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거짓 목자들은 계속 잘나가는 줄 알고 으시대며 살겠지만 하나님의 때와 뜻을 알지 못하면 그날 재림하시는 예수님 앞에가서 슬피 울려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애곡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애곡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목자들이 끝에 가서 애곡한다는 것이고 그 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애곡은 ‘너무 슬퍼서 큰 소리로 운다’는 뜻인데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언제 우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여호와의 진노를 통해 다 죽게 되었을 때 눈물로 부르짖으며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를 따로 기록할 정도로 민족이 겪을 환난을 알고 울며 외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면 하나님이 쓰실 종들의 입에서 저절로 탄식이 나오고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해서 쓰실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본 교회는 회개의 눈물이 있었고 울고 통곡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가을에 농사 다 끝내고 겨울이 되면 부흥회를 하는데 능력이 있는 부흥강사가 오시면 교회에 회개운동을 일으켜서 울음바다가 되고 눈물이 뒤범벅이 되도록 울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교회 안에서 눈물과 울음이 사라졌습니다. 

 

  부흥강사가 있기는 한데 그전같은 회개운동은 일어나지 않고 재미난 예화, 웃기는 얘기 몇 가지고 하고는 끝납니다. 

 

  부흥사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나요? 기도나 회개운동을 하나요? 

 

  헌금이나 많이 나오게 해서 자기 사례비 더 챙기는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은가요? 여기에 무슨 눈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상황이 이런데 예수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한다는 것이며 준비도 없이 맞이하겠다는 것은 땀한방울 흘리지 않고 거저 먹겠다는 불한당과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준비하면서 미리 울면 재림 날 가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눈물과 탄식이 없으면 그날 가서 울게 되는데 이 울음과 눈물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초장으로 황폐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초장은 교회인데 초장에는 풍성한 꼴이 있어서 마음껏 먹고 쉬며 무럭무럭 성장해야 하는데 마지막 때가 되면서 하나님이 초장인 교회를 황폐케 하신다는 거입니다. 

 

  이렇게 되면 꼴이 있는 교회와 없는 교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입에서 약속의 말씀이 나오느냐?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면서 복받으라는 얘기만 하느냐? 이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비극은? 믿음과 구원을 말하면서 정작 그날 가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믿지 않고 잘못 믿었기 때문이며 이것이 목자들에게 닥친 상황이었습니다.

 

  결론으로 오늘 본문에서 목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마음에 담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날까지, 또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을 지키시길 소망합니다.   


기사입력: 2024/12/22 [19:16]  최종편집: ⓒ 서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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