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가 시드기야에게 하신 말씀 세 가지
- 렘34:4~5 -
 
서산뉴스

 

  저의 주변에서 돈을 쉽게 잘 버는 사람을 보면 돈이 다니는 길을 알고 거기에 투자를 합니다.

 

  요즘은 주식이 대세인데 어떻게 아는지 가격이 올라갈 주식만 용케 매입을 하니 돈을 벌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잘하려면 길을 알면 되는데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고 성경이 우리 믿음이 가야 할 길입니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실 일’을 모두 기록한 책인데 ‘하신 일’은 역사이고 ‘하실 일’은 예언입니다.

 

  이 중에서 하신 일만 보고 가면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고 하실 일을 보고 가면 미래로 가는 길입니다. 

 

  깨어있는 신앙은 하신 일을 토대로 미래를 향해 앞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고 앞에 있으니 약속이며 약속이라서 예언인 것입니다. 

 

  계시록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미리 기록으로 남겨 가야 할 길을 제시하셨으니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예비하신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대한 내용인데 그는 매우 절망과 낙담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대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무서운 심판의 폭풍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시드기야 왕에게 뜻밖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너는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으며 사람들이 분향하고 슬퍼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은 여호와가 시드기야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깨닫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왕이든? 백성이든?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나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야 원래 하나님하고 상관이 없으니 듣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은 침묵 속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먼저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 말을 듣는 대상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구약에서는 히브리 민족이고 신약에서는 교회 민족입니다.

 

  그런데 말은 교회 민족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때를 따라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모르고 있다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을 듣는 것이고 들어야 할 내용에는 예언의 말씀을 포함합니다.

 

  *잠언2:1절에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 있습니다.  

 

  5절에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3:1절에서는 “내 아들이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4:4절에는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4:20절에는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고 하셨고  제가 몇 구절 읽어 드렸지만 잠언에는 이런 말씀들이 차고 넘칩니다.   

 

  잠언은 솔로몬이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한 말이고 이것은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마7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7:24~25).

 

  먼저는 들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행하라, 즉 믿으라는 내용입니다. 

 

  *요5:24절-“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롬10:17절-“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데 믿음이 임하는 통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것도 그때그때 주시는 말씀을 들으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계2~3장에 일곱교회가 나오는데 각 교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고 하셨습니다.

 

  즉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계시록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성령이 그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정상인데 입으로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남의 아버지가 하는 말을 더 좋아하고 거기에 현혹돼서 따라간 것이 유다 백성들이었고 우상숭배였습니다.  

 

  이것은 시드기야 왕을 비롯해서 유다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내 말을 들으라'고 강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소리를 듣는 행위를 넘어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계시록에서 설명하는 것을 보시면!

  1)계1: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은 시작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에 따른 '복'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귀에 들리니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들은 내용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삶 속에서 그 말씀대로 믿을 때 비로소 진정한 복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2)계3:20절에서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내 음성을 듣고'는 강제하거나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자발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친밀한 부르심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팔랑귀가 되어서 분별없이 아무 말이나 들으면 잡탕이 되어서 안됩니다. 

 

  들어야 할 말씀은 이 시대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저는 그것을 요한계시록으로 연결합니다.

 

  저는 이왕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면 계시록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예언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표현이 신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지만  여건상 교회에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주일날 습관적으로 교회 가서 현실과 동떨어진 말을 듣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도 아직 정립은 되지 않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로 유튜브를 통한 온라인 예배가 많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은 없는 채 성경 몇 구절 읽어 놓고 예화나 간증을 섞어서 하는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지만 교회에서 하는 말이라고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설교에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이 포함될 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분들도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굳이 그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지키는데 몰두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와 세례를 강조하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외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생활은 잘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했고 그 결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귀로만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은 말씀이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가서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유다의 왕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사람인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믿음이 좋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반드시 계시록을 통해 주시는 약속의 말씀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시드기야는 나라를 망친 왕인데 평안히 죽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약속입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왕으로서 이게 더 구질구질 할 수 있지요? 

 

  왕이지만 남자답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시드기야에게 수명대로 살다가 평안히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시드기야 입장에서 이게 진짜 평안한 죽음일까요? 

 

  자유도 없고 왕으로서의 존엄성도 상실한 채 억지로 목숨만 유지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드기야 왕에게 말씀하신 ‘평안히 죽으리라’는 말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는다는 뜻일 뿐 행복한 죽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죽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데 저도 환갑이 지나고 부터는 가끔 씩 혼자서 ‘하나님 안에서 잘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을 비켜 갈 수만 있다면 죽지 않는 방법을 찾겠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평안히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 말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처음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후에 치료를 받으시고 회복하셔서 집으로 가셨고 주변에서 벌침을 맞으면 좋다고 해서 일주일이면 두 번씩 서산 팔봉으로 가셔서 벌침을 맞으셨습니다.

 

  저도 몇 차례 아버지를 모시고 갔었는데 벌침 놓는 곳이 큰길에서 좀 들어간 곳에 남향의 야산 중턱에 집을 짓고 염소도 키우며 무료로 벌침을 놓는 집사님 부부셨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벌침을 맞고 나오셔서 그러시더라구요. 여기 산세가 좋은데 몇 천평 사서 가족 묘지로 하면 어떻겠니? 

 

  그리고는 얼마 있지 않아 뇌수술을 하게 되고 재발해서 다시 수술하시면서 병원을 전전긍긍하시다가 돌아가셔서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비관하고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안죽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도 안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강건하면 80이라고 했는데 잘 먹고 환경도 좋아졌다고 해도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몇 살 까지 살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어느 의사분이 설명하는 것을 들었는데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남녀 평균 83.6세이고 건강수명은 65세라고 합니다. 

 

  65세가 넘으면 그때부터는 건강이 급격하게 약해지고 순발력과 기능도 점점 떨어지며 약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은데 이런 생각을 하면 서글프지요?  

 

  저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도 굉장히 힘들었겠지만 시드기야 왕의  좌절과 낙심은 굉장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그에게 평안을 말씀하셨어도 얼마나 도움이 됐겠어요. 마음이 평안해야 하는데 포로가 되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까요? 

 

  제가 살면서 터득한 것 중 하나는 사람이 살면서 몸은 좀 힘들어도 마음이 평안하면 몸이 힘든 것은 감당할 수 있지만 몸은 편한데 마음이 힘들면 그는 몸도 힘들구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으로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그로 인해 몸도 편하고 건강해지시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시드기야는 유다에서 다윗 혈통을 끝낸 마지막 왕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의해 두 눈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땅의 왕권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는데 바벨론을 물리친 하나님의 종들에게 왕권을 주시고 영안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계시록이 말씀하는 위대한 축복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평안입니다.

 

  세 번째, 사람들이 네게 분향하고 애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당장 칼에 죽지 않는다는 말에 내심 안도했을지 모르지만 이런 삶이 오히려 더 비굴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왕과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유는?  불순종과 우상숭배 때문인데 평안히 죽고 사람들이 분향하며 애통으로 너를 떠나보낼 것이라고 하시므로 그나마 왕의 체면을 세워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분향하며 애통하는 장면을 요한계시록은 ‘심판’과 ‘애가’의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계18장에는 왕들과 상인들이 향과 기름, 값진 물품을 잃고 애통하며 울부짖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때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때문에 멸망을 당하지만 계시록에서는 오히려 바벨론이  울부짖으며 멸망 당하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것에 대해서도 예레미야 때는 시드기야의 죽음 앞에서 분향하고 애통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 멸망할 때 세상의 왕들과 상인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화 있도다 화 있도다”(계:18:10,16,19)하면서 애통해 합니다.

 

  예수님은 마5장 산상수훈을 통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도 애통할 일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애통할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애통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악인이 득세하고 거짓선지자가 난무한 것을 보면서 울부짖는 것이 애통이고 하나님은 그런 기도와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들이 육적으로는 기쁨과 소망이 있고 즐거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맨날 징징거리고 다른 사람들과 꼬약거리며 싸우기나 한다면 그것은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교회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보면서 울부짖어 기도하고 거짓선지자나 음녀가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겔9:4절-“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 거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고 교회가 잘못 가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야 하고 ‘탄식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이미에 인을 치셔서 표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 나라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때 깊이 애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왕의 죽음과 나라의 멸망에만 머물렀습니다. 

 

  정작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역한 결과라는 사실에는 애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유다는 영적으로 무뎌졌던 것입니다.

 

  결론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과 거룩한 탄식,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울 수 있는 종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사입력: 2026/05/03 [12:57]  최종편집: ⓒ 서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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