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기온이 1년 중 최고로 좋아서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5월도 후반으로 접어들고 이제 곧 무더운 여름으로 접어들 것입니다.
교회 마당에 주렁주렁 열린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됩니다.
세상의 계절이 봄-여름-가울-겨울로 바뀌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고 대비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 1~2절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의 집으로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위에 앉은 왕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왕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신하와 백성이라고 해서 왕의 말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공평과 정의를 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에 왕을 비롯한 신하와 백성들 모두 위로부터 주시는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들어야 믿음이 생기기 때문인데 학교에 간 학생은 선생님이나 교수님의 가르침을 들어야 하듯이 유다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특히 왕이라고 했을 때 지금 세상에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있나요?
물론 왕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상징에 불과하고 과거의 왕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이 시대에 교회에 주신 말씀이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의 왕과 신하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세 가지를 깨닫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에게서 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탈취를 당했다는 것은 빼앗겼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자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야 하기 때문에 왕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실 때는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고 왕이 말씀을 들어야 신하와 백성들도 듣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존재하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소홀히 하고 다른 것에 집중한다면 변질된 것이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에 등장할 황충이와 마병대는 변질된 교회에서 나오고 그들이 하는 일은 미혹하는 일인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하나님의 뜻이 없으며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며 복 받으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설교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 설교한다면 그 설교를 듣고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매주일 하는 설교에 하나님의 뜻은 없고 맨날 복 받으라는 말만 한다면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 보다는 복이 우선이 됩니다.
사람은 무슨 말을 듣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이 달라지고 또 그만큼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고 지금 듣는 설교가 그 분의 신앙수준입니다.
2024년 5월 달을 살고 있는데 이 시점에서 모든 교회들이 앞장서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황충이와 마병대를 설명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황충이의 특징과 그들이 나오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기는지를 설교한다면 얼마든지 대비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회들마다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을 강도 높게 설명하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성경적으로 알려 준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재림은 100년 전보다, 50년 전 보다 가까워졌는데 안타깝게도 재림설교는 교회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회가 정상이라면 성경을 통해 재림을 설명하며 깨어있으라고 강조하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준비시켜야 하는데 거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무조건 허공에다 대고 주여주여 한다고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보면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여주여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즉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뜻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래야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압박하고 억압하는 자에게서 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하나님의 영향력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고아=육신의 부모가 없으니 얼마나 불쌍해요? 영적으로도 부모가 없으면 영적 고아인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과부=남편이 없는 여자이니 살 길이 막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와 믿는 자들의 남편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없다면 그는 과부와 같은 자들이고 예수가 없는 교회는 과부교회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이 세 가지 부류에 해당하는 이 사람들은 사회적인 약자였고 근근히 살아가기 때문에 돌보고 보호해 줘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할망정 압제하고 학대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향해 무시하고 핍박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알려줘야 하고 과부는 놀림의 대상이 아니라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거짓선지자나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나온 세력이라서 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물리치고 척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 이방인, 고아, 과부와 같은 교회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라서 사람이 사람을 향해 압제하거나 학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일본 식민자로 살아갈 때 압제를 당하며 우리 말이나 글도 못쓰게 하고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등 얼마나 서러움을 겪어야 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향해 학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통제하며 압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유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부자는 아니더라도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흔히 세계의 여러 나라를 이념적으로 구분할 때 자유민주주의, 공산(사회)주의로 나누는데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개인의 자유가 최우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목적을 위해 개인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코로나가 한참 창궐할 때 문재인 씨가 교회 예배를 통제하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음식점이나 카페 출입도 제한했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하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은 분명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잘 아는 분이 시장으로 있었는데 유럽을 방문하고 와서 하는 말이 그 나라에 가니까 마스크 쓰는 것을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개인의 선택으로 결정하게 하지 우리나라처럼 강압적으로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푸틴 체제로 장기집권을 하고 있고 중국 시진핑이 영구집권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북한 김정은은 3대 세습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런 나라의 공통점은 공산주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거짓선지자가 나오면 성도들의 자유를 빼앗고 믿음을 빙자해 인권을 유린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할 것입니다.
여기에 한층 더해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면 그야 말로 교회가 공산주의처럼 돼서 모든 것이 적그리스도 체제로 들어가 개인의 목소리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오직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노릇을 하며 강압적으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
*계13:6절-“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13절-“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이것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사하는 사단의 능력입니다.
*15절-“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13장에 나오는 짐승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하나님께 가야 할 영혼들을 사로잡아 짐승을 경배하게 하며 짐승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는 일을 하니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이런 짐승들이 나오면 그때부터 믿음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오직 이 짐승들 천하가 돼서 교회에서 활동하며 신자들을 영적으로 압제하고 학대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세 번째,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살인을 한 가해자는 가인이고 그때 살해를 당한 피해자는 아벨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부모 자식 다음으로 가까운 형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벨은 형 가인이게 돌에 맞아 죽었는데 아벨에게 무슨 심각한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사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고 틀린 주장을 하시지도 않았으며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목수의 아들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참람되다고 죽였습니다.
스데반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회개하라고 말한 것 외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돌에 맞아 무죄한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계11장에 나오는 두증인은 지팡이 같은 갈대를 가지고 등장해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일을 합니다.
이뿐 아니라 두증인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굵은 베옷을 입고 1260동안 예언을 하며 모세의 권세, 엘리야의 권세를 행합니다.
하지만 기한이 다하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사흘 반 동안 장사도 지내지 못한채 목도하며 큰 성길에 방치했습니다.
신앙이 잘못되거나 시대가 바뀌었는데 옛날 법에 매몰돼서 새 법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무죄한 자를 피흘려 죽게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을 보면 자기들이 옛날 법에 쩌들어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면서 새 시대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교단 안에서 영향력이 있던지 아니면 교회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보니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를듯 합니다.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권력을 남용하고 목에 힘이 들어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니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지적하고 비난하며 난도질을 해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가요? 모든 분야를 다 섭렵했나요?
어찌보면 성경보다는 신학이라는 굴레에 갇혀 중세 때 만들어 놓은 교리에 매몰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정도를 알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 소경이고 벙어리이며 제2의 바리새인에 불과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물론 성경과 아주 다른 형편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는 신앙적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때로는 이해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도 정통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들과 맞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이단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단이란 끝이 다르다는 말인데 정말 성경과 다르다거나 교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야 당연히 이단으로 평가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의 문제를 가지고 접근해서 성경 해석의 오류를 문제 삼는 것은 가능하지만 적용의 문제를 가지고 몰아붙인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분명 친구였고 동역자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입장이 달라지면 언제 친구였느냐고 등에다 칼을 꽂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도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으로 하나님이 왕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이 시대로는 교회를 차지하고 왕 노릇 하는 변질된 목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종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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