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악의 무리들이 하나님이 마지막에 쓰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욕단족속 대한민국을 찬탈하려고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공수처든, 경찰이든 공권력을 행사하려면 합법적으로 해야 하는데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우두머리에는 형수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고 백현동, 정자동, 대장동 등의 불법적인 일로 재판을 받는 민주당 이재명이 있다고 한결같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루빨리 우리나라가 정상화 되고 모든 악의 무리들이 소멸되길 바랍니다.
대부분의 엄마들을 보면 자식에게 온통 관심과 비중이 쏠려 있습니다.
물론 자식이 어렸을 때야 당연히 돌보고 키워야 할 책임이 있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자식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남편에 대한 비중도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을 보면 엄마들이 남편 보다는 자식에게 기울어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당연히 그러셨구요 제 아내도 아침에 큰 아들이 화장실에서 세수하다가 코를 세게 풀면 즉각적으로 ‘신영아! 그러다가 고막에 문제 생긴다’고 걱정스러운 반응을 합니다.
한번은 제가 시험을 해봤어요. 일부러 세수를 하며 아내 들으라고 코를 세게 풀었는데 아내는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몇 번을 시도해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저의 아내이지만 동시에 아들의 엄마지요?
자식은 자기 몸으로 잉태해서 열 달 동안 몸 안에 함께 있다가 세상에 나왔으니 여자에게 자식은 자기 몸처럼 소중하고 모든 관심이 가 있을 수 밖에 없구나 하고 이해를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를 청종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법을 행치 않았다고 말했더니 예레미야를 붙잡아서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런 것 같습니다. 사탕발림으로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아부나 칭찬을 해주면 좋다고 하면서 쓴소리를 하고 책망을 하면 그 말이 옳을지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유다 백성들의 마음상태 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때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선지자의 말을 거역하고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요?
오늘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쳤을 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백성들이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본문을 통해 세 가지를 깨닫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 왜 이 집이 실로같이 되겠다고 예언했느냐는 것입니다.
실로는? 히브리 민족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 한 후에 광야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정복한 직후 성막을 보관해 두었던 특별한 곳입니다.
그 후로 사사시대 말기인 엘리 대제사장 때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기 전까지 실로는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였습니다.(삼상4:3).
그리고 실로는 출애굽 한 히브리 민족이 광야 40년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광야에서 모세의 지시로 만들었던 성막도 실로에 옮겨졌고 사사 시대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을 정도로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실로에 대한 내용을 보시면 실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성막(회막)이 세워진 첫 번째 장소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실로는 초기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배우는 중요한 장소였으며 법궤를 모셔 놓은 성막은 약 약 300년 동안이나 실로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실로는 사무엘상의 배경이기도하고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장소도 실로였습니다(사무엘상1:9-20).
그렇게 태어난 사무엘이 어린 시절 실로에서 성막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습니다(사무엘상 3장).
그러나 실로는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안타까운 사건을 경험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언약궤를 전쟁에 가지고 갔다가 패배하면서 언약궤를 뺏기고 실로도 파괴되었습니다(사무엘상 4장).
이후 실로는 점차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게 됩니다.
한때 실로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 제사장으로 그 가문의 시대가 끝나는데 이유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형식은 갖추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없었고 제사장, 선지자, 사사라는 직분은 가지고 있었지만 더 중요한 하나님의 법과 영은 없었었습니다.
엘레는 한때 하나님이 쓰셨을지라도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역사에는 발붙일 곳이 없었고 새 시대에는 새 사람을 쓰시는데 그가 사무엘이었습니다.
예수님 초림하셨을 때도 바리새인들은 옛 법에 충실했고 경건생활에 철저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주신 새 법이 없으니 새로운 역사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실로같이 되겠다는 것은 실로가 한 때는 성소가 있던 곳이었고 기도하던 장소였지만 나중에는 멸망을 당한 것처럼 유다도 그렇게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2쳔년대 이후의 교회를 보면서 너도나도 한결같이 교회시대가 끝났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특히나 기도생활을 하시거나 성경을 깊이 탐구하시는 분들은 누구보다 이런 현상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동안은 교회가 잘 된 것은? 잘 해서 잘 된 것이 아니라 잘 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잘 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람도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서 더 이상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라 영그는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을 하면서 여전히 숫자의 증가를 교회성장이라고 강조한다면 때를 모르는 소경이라는 증거입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치중해서 교리적인 설교만 하고 있지 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면 실로 같이 끝에 가서 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법이 임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것인데 이게 안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
둘째, 왜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고 예언했느냐는 것입니다.
성에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며 수시로 왕래가 있어야 하는데 황무하다는 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TV에서 방영하는 어프리카나 네팔, 부탄과 같은 오지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취재해서 보여주는 것을 유심히 봅니다.
도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비만 오면 차가 빠지고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산악지대에서 말로 물건을 실어나라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지금이야 어렵더라도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근근히 살지만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그런 지역에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나중에는 동네가 없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진 것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은 변질된 교회를 의미하는데 정상적인 교회라면 바벨론이 되면 절대 안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실 때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며 물과 피를 다 쏟으셨는데 그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우도 바벨론이 되면 안되는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시간이 다가오면 땅에 속한 교회는 바벨론이 되고 그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 거짓선지자입니다.
계18장에서 바벨론에 대한 설명을 보면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는데 유심히 보니 거기가 바로 ①귀신의 처소와 ②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③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말씀과 연결해서 한 가지만 설명 드린다면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영적인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더러운 새들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증한 새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교회에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없으니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고 예언한 것이 계18장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잘못 믿었기 때문인데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이 없이 옛날 것만 붙잡고 그만만 읇조리고 있다면 거기가 바로 바벨론입니다.
제가 23~4년쯤 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몸이라는 교회가 형과 의식에 치우쳐 있는 캐토록이 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롬8장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고 영은 말씀이며 말씀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믿음은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늘의 법이고 땅의 것이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땅에서의 상이 아니라 하늘에서 상 받을 자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인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뜻대로 믿어야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내 듯대로, 내 마음대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이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거기는 황무하여 거민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세 번째,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에게로 몰려 왔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을 먹도록 위협하는 것인데 이유는? 왜 그런 예언을 했느냐?
잘 된다고 하고 복 받으라는 설교를 해야지 왜 환난이 온다고 설교를 하고 심판이 온다고 하면서 겁을 주느냐? 왜 황무해 진다고 예언했느냐?며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이 말인즉 백성들이 듣기 좋은 설교를 해야 하는데 예레미야의 설교는 마음에 찔리고 듣기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레미야가 하는 설교가 진짜이고 살리려는 것인데 백성들은 진실을 듣기 싫어했고 그 말 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다녔지만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이후의 삶은 제자에서 사도가 되었고 그의 설교에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는 진정으로 감동을 받아 반응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비슷한 상황으로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도 보면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렸습니다.(행7:54)
그러나 그 다음 반응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고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행7:54, 57~58)
이렇게 반응한 이유는 듣기에 불편하고 거부감이 나는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설교자들은 청중들이 부담없이 듣기에 좋은 설교나 비위를 맞추는 설교가 아니라 마음에 찔리는 설교를 해야하고 다가 오는 환난과 심판에 대해 외쳐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잘못 믿고 있다. 그렇게 믿음생활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다 등등의 내용으로 설교하면 듣기에 거북하거나 불편한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러니 아예 그런 설교는 안하고 듣기에 무난한 설교, 지적하거나 책망이 아닌 격려하고 칭찬하는 설교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면 그들의 설교는 매정할 정도로 날카롭게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했고 그러다 보니 인기가 없는 설교자였습니다.
아모스 신자자도 보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설교하며 이스라엘의 죄악과 부패를 책망하고 그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
그러나 아모스와는 반대로 아마샤라는 선지자는 아모스의 예언을 불편하게 여겼고 왕에게 고발했으며 아모스를 향해 예언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렇게 대조적으로 나타난다면 듣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겠어요? 당연히 아모스를 붙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설교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그들을 잘 분멸해서 참선지자 편에 서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아모스 때처럼 지금도 사람들은 책망하고 심판에 대한 설교를 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증거했는데 그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나타낸 반응은 싸늘했고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정상이 아닌 거지요? 믿음이 삐둟어지면 그 사람의 인격도 잘못되고 인간관계도 다 파괴시킬 정도로 난폭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의 제사장, 선지자, 모든 백성들이 보인 반응은 지극히 비정상입니다.
정상이라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 말하는 예레미야를 죽이겠다고 겁박한 것입니다.
결론으로 하나님의 명을 받아 올바른 예언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터무니없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영광과 명예가 아니라 핍박과 협박, 죽음이 위기를 만나기도 한다는 것을 보면서 어떤 경우에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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