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상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식을 가지고 믿음을 판단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상식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방주를 지을 때 측근들이 들고 나온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상식으로 보니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고는 노아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면서 따졌던 것입니다.
상식과 믿음은 전혀 다른데 상식은 순리이고 땅의 법이라면 믿음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늘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순리를 가지고 진리를 공격하는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순리의 말을 듣고 그쪽으로 치우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교회는 순리에 익숙한 사람들을 말씀으로 변화시켜서 진리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처럼 상식은 있고 순리는 통하는데 믿음은 없는 것이 이 시대의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신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순리의 사람을 진리의 사람, 즉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오늘도 재앙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시는데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고 대풍이 땅 끝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풍은 큰 바람이라는 뜻으로 환난의 바람이 불어올 것에 대해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은 큰 재앙 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깨닫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 여호와께 살륙을 당한 자가 나타납니다.
살륙을 당했다는 것은 죽임을 당했다는 뜻인데 사전에 보니 “무엇을 트집 잡아 사람을 마구 죽인다”입니다.
*겔9장-살륙하는 기계가 나오는데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에게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오게 하라”(겔9: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자 마자 여섯 사람이 북향문 위쪽 길로 쫒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육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차고 있었습니다.(겔9:2)
그가 하는 일은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겔9:3)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볼 때 살륙하는 기계를 가지고 살륙을 행하는 자가 있고 그때 살륙을 당하는 자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서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차고 살륙하는 자가 되어야지 살륙을 당하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안될 일입니다.
*계8:11절-“이 별의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계9:18절-“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고 하셨고 이것이 여섯째 나팔에 나타날 죽이는 역사입니다.
*계14장에는 예수님이 인 맞은 종들과 함께 시온 산에 재림하시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부분을 예언하기를 “그날이 되면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다”(사66:15~16)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고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살륙하고 죽인다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랑, 자비, 용서 이런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죽이고 살륙한다는 것은 공산당들이나 하는 일이고 교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라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이 또한 기독교이고 성경입니다.
정말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성경을 통해 배우고 그 방향으로 가야 정상입니다.
세상에서도 살 일을 하는 사람은 살고 죽을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방향으로 인도함 받으면 사는 것이고 죽을 일만 골라서 하면 살륙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 받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선악과를 통해 사는 길과 죽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동산 안에서 마음대로 다 하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결과가 어떻게 됐어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의 열매를 먹었고 그 결과 에덴에서 쫒겨났을 뿐 아니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데 목적은? 심판(계14:7)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어디를 심판하시느냐?
계18장에서는 바벨론(계18:4~8)이라고 했고 계19장에서는 음녀라고 했는데 이 둘은 같은 것으로 결국은 음녀교회(계19:2)를 심판하신다는 것이 계시록입니다.
*계19:20절-“짐승과 거짓선지자를 잡아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
*계20:1~3절-“옛 뱀 마귀 사단인 용을 잡아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인봉하여 천년동안 가두어 놓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위대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니 이 말씀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런 엄중한 재앙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교회 다니기만 하면 믿음이고 주여주여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어린 아이식 믿음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아울러 믿음이 장성해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환난 날에 살륙당하지 않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에 들어가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슬퍼함을 받지 못합니다.
동물과 달리 사람에게는 희노애락이 있어서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슬퍼하며 그때그때 상황을 표현하며 살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슬퍼해야 하는 상황에서 슬퍼함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도 견디기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오래 전 일인데 대산출신으로 저보다 몇 년 선배인 분이 가족들과 의정부로 이사가서 살면서 택시 일을 하다가 졸음운전을 했는지 가로수를 들이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분 장례식을 임종예배 부터 하관까지 제가 인도했는데 그분 큰 딸이 중학생이었고 아직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큰 딸이 얼마나 대성통곡하며 구슬프게 우는지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나이가 드신 여자 분이 전도사님이라고 하던데 우는 딸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기절을 할 뻔했습니다.
야!! 너 그렇게 계속 울면 엄마 천국에 못간다...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이예요?
중학생인 딸이 그 말을 듣고는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울음을 삼키느라 흐느끼며 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야! 울고 싶으면 참지 말고 마음껏 울어라.
사람이기에 살면서 슬픔과 탄식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로 점점 성숙해 가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슬픔을 기쁨으로 서서히 승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슬피 울려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고 이 슬픔은 속아서 잘못 믿음 것에 대한 슬픔이고 울음일 것이며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억울함일 것입니다.
여기서 슬퍼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슬퍼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끝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슬퍼할 수 있을 정도의 슬픔은 가능성이 있지만 슬퍼할 수 없는 슬픔은 거기가 끝입니다.
사람이 가장 힘들 때가 언제겠어요? 더 이상 좋아질 가능성이나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지만 사단은 계속해서 절망감을 주고 안된다. 망한다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주입합니다.
예레미야가 슬퍼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한 것은 고난과 슬픔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위로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슬픔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오는 결과인데 슬퍼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유다백성들이 죄로 인해 스스로 초래한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염습과 매장을 얻지 못하고 지면에서 분토가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해야 하고 땅에 매장을 해야 하는데 매장을 못하면 시신이 썩어서 지면에서 분토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부고장을 받고 고인의 빈소를 찾아가는데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제일 보기 싫은 것이 현관 입구 쪽에 수의를 입혀 세워놓은 마네킹이 제일 보기 싫습니다.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실현 가능할지 모르지만 저는 수의를 입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그전에는 장례식장에 장의사가 다 알아서 했는데 지금은 이름도 바뀌었습니다.
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염사라고 하고 시신에 수의를 입힌다고 해서 습사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장례지도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삶을 끝내고 마지막 가는 길에서 마무리를 하는 분들입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배냇저고리를 입고 요람에서 응애응애 하다가 마지막에는 수의를 입고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좋은 부모 만나 축하와 환영을 받으며 사지가 멀쩡하고 건강하게 잘 태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마무리를 잘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아쉬움 속에 잘 죽어서 영혼은 하나님 품에 앉기고 육신은 염습과 매장(화장)을 얻어야 합니다.
삶의 선상에서 볼 때 죽음은 끝이고 슬픔이며 단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안식이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시1편-복 있는 사람과 악인에 대해 설명하면서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러나 반대로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청년 때 아버지께 들은 말인데 옛날에 아버지가 사시던 이북에서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반쪽 장레식만 치러줬다고 합니다.
장례식 날 시신을 관에 담아서 메고는 가는데 땅에 묻지 않고 산 중턱에 놔둔답니다.
그렇게 2년이고 3년이고 지나다 보면 시신이 다 썩을 것이고 그러다가 그의 부모가 돌아가시고 장사를 지내고 나서 동네 사람들이 자식의 뼈를 수습해다 장사 지내준다고 합니다.
아마도 부모 보다 먼저 죽은 불효를 범했으니 부모 보다 먼저 땅 속에 들어가는 것은 안될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성경은 삶을 마치고 하나님이 부르신 후에는 영은 하나님께로 가고 육신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원리인데 육체를 매장도 하지 못하고 분토가 될 정도라면 영혼은 어떻겠습니까?
이 부분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왕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잘 믿자는 것이고 똑바로 믿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주신 계시록의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의 뜻과 법을 깨닫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고 미혹을 이기면 하나님은 그를 변화체로 만드셔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주여주여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믿지 않으면 불법을 행한 자가 되어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그 영이 분토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변화체가 되어 하나님께로 올라가야지 이 땅에서 분토와 같이 바람에 날려 다니는 허무맹랑한 신앙이 되면 안됩니다.
결론으로 성경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재앙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어 이 땅에 재앙을 보내시면 어떻게 되는지 오늘 말씀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을 강화하고 믿음의 고도를 높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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